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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5/생각

하나의 화두로 빨려드는 것들

1.

요새 화두가 하나에 몰려있다보니, 보고 듣는 모든 것들이 그쪽으로 몰린다.

하나의 생각으로 필요한 것들이 선택적으로 지각되고 빨려드는 통합 현상.

스물 세 살 이후로 이런 현상을 처음 겪는 것 같다.

생각하고 경험하고 고민할 시간과 여건이 주어져서일 것이다. 감사하다.

 

 

2.

정선율을 설명하시다가 갑자기 던진 질문.

- 나는 어딘가에 바탕을 두고 살아, 아니면 종잡을 수 없게 살아?

- 어디에 바탕을 두고 살아?

 

그리고 이어지는 비유가 기가 막히다. : 납치에의 비유.

갑자기 납치당해서 눈이 가려진 채 어딘가에 끌려갔다고 하자.

어딘가에 태워졌고, 이윽고 가려진 눈이 밝아졌는데, KTX다.

이 상황에서 그 사람은 과연 잠을 자고 밥을 먹을 수 있는가.

 

어디로 가고 있는건지, 내가 어디서 탔는지, 어디서 내릴건지 알 수가 없는데,

다음 상황이 나타나기 전까지 마음 편히 경치를 보고,

계란을 까먹고, 잠을 잘 수 있는가.

 

바탕 없이 사는 것이 마치 이와 같다.

납치당하는 것과 같은 공포.

내가 학교에 근무하며 느낀 공포가 이 정도와 같은 공포였다는 걸,

달리 설명할 길이 없었는데, 이제 찾았다.

납치당하는 공포, 딱 그 말로 설명이 된다.

인생을 바탕없이, 정선율 없이 산다는 것은 납치당한 상태와 같다.

본인의 뚜렷한 가치관 없이 남들 사는대로 사는 것은, 납치당한 것과 같다.

그래서 불안해지고, 비교하게 되고, 초조해지고,

타인을 비난하게 되고, 쓸데없는 수준의 기대를 하다가 실망하게 된다.

 

 

3.

'어머님께'라는 곡을 받치고 있는 반주는 4마디 짜리가 처음부터 끝까지 반복된다.

집요하게 반복되는 그 진행 위에

경박한 랩과 호소력 있는 멜로디의 노래가 번갈아 얹혀진다.

자식이 안정감을 갖고 지낼 때도, 방황하고 힘들 때도,

늘 공기처럼 있는 듯 없는 듯 근간을 받치고 있는 존재가 어머니다.

그 존재로 인해 경박한 랩은 경박하지 않고 균형감을 갖게 된다.

아래를 받치고 있는 그 똑같은 반주가 어머니의 존재이고, 힘이다.

사람들은 화려한 멜로디와 랩을 들을 뿐 반주에는 아무도 주목하지 않지만,

그래서 처음부터 끝까지 그 똑같은 4마디가 반복된다는 사실조차 모르지만,

사실 음악에서 가장 중요한 것이 아래 성부다.

아래 성부 없는 화려한 윗성부는 공허할 뿐이다.

 

삶의 근간을 이루는 아래 성부를 찾아야 한다.

바탕을 이루는 소리를 찾지 못하고 쌓는 모든 것들은 공허할 뿐이다.

 

 

4.

사람들은 준비 없이도 아름답게 살고 싶어 한다.

그리고 하는 일 없이 대접받고 싶어한다.

 

중세 음악은 마치 음악의 태아 시절과 같아서,

아무도 그 시절을 기억하지도 가늠하지도 못하지만,

우리가 소위 '음악'이라고 기억하는 바로크 시대의 음악이 나오기까지 필요했던,

그 모든 요소들이 만들어진 시기였다.

박자표, 길이 단위, 다성 음악 등 모든 것의 기초가 이 시기에 만들어졌다.

실체조차 없어보였던 중세 음악은 분명 실존하는 것이었고,

현재 사람들이 자각조차 하지 못했던 음악이었지만

이 시기 없이는 바로크 시대부터의 음악은 존재할 수도 없었다.

중세시대에, 그 거대한 암흑기에, 그래서 아무도 기억하지 않는 그 시기에,

음악은 아름답기 위한 준비를 비로소 끝냈다.

 

중세 건축물들은 어쩌면 이해가 안 될 정도로 엄청나게 공들여져 만들어져있다.

아름답게, 대접받고 살고 싶다면, 공을 들여야 한다.

암흑기를 기꺼이 받아들이고 맨땅에 헤딩할 각오로 준비해야 한다.

나는 무슨 일에 공을 들이고 있는가.

 

 

5.

대충형 인간.

가장 중요한 것이 무엇인지 알고 그것을 지키는 데 집중한다면,

나머지 것은 대충 해도 된다.

 

 

6.

장꿈씨의 강연.

동일한 메시지를 전하고 있었다.

큰 걱정 없이 남들처럼 살되 공허함을 감수하고 살 것인가,

내가 원하는 삶을 나답게 선택하되 그에 따른 외로움과 어려움에 대한 책임을 질 것인가.

다만 스스로에 대한 고민과 주관 없이 살 것을 선택한다면

평생 자신의 꿈을 위해 일하는 사람들 밑에서 살 수밖에 없다.

 

 

7.

고전의 지혜, '종오소호' : 내가 좋아하는 것을 하리라.

 

- 공자는 단 한 번뿐인 인생을 자신이 좋아하고 의미 있는 방향으로 나아가고자 했던 것이다. ‘좋아하는 것을 하며 사는 삶’.

 

- 봄, 여름, 가을, 겨울... 올 봄이 가더라도 내년 봄을 기약할 수 있어 마치 인생이 반복되는 것처럼 느껴질지 몰라도, 지금 이 순간은 단 한 번뿐이듯, 인생은 되돌아갈 수 없는 단 한 번의 시간의 연속이다.

 

- 자신이 좋아하는 일을 하고 있다면, 자신이 그 일을 결코 그만두지도 않을 뿐만 아니라 그 일을 하면서 삶의 의미를 찾을 수 있기 때문이리라.

 

- 삶의 불안과 우울 : 예비 신랑신부는 축복 속에 결혼식을 치루겠지만 이후에 펼쳐질 출산, 육아, 집값을 생각하면 답이 나오지 않는다. 한 치 앞을 모르는 삶을 살아가야 하는 운명에 놓여 있는 한 우리는 불안으로부터 완전히 자유로울 수 없다.

 

- 19세기 러시아의 대표 시인 푸시킨(1799~1837)은 사람이 알 수 없는 미래와 우호적이지 않는 현실 때문에 될 듯 말 듯 알 수 없는 세상에 속아 휘둘릴 수밖에 없다고 읊고 있다. 하지만 푸시킨은 사람이 뜻대로 되지 않는 현실과 미래로 인해 영원히 속지 않고 세상을 헤쳐 나갈 수 있다고 보았다. 왜냐하면 사람은 세상의 흐름을 따라가는 수동적 존재에 그치지 않고 현실에 도전하여 이길 수 있기 때문이다. 이로써 삶은 뜻대로 될 듯 뜻대로 되지 않는 속임의 연속이 아니라 그러한 속임을 넘어선 희망을 품고 있게 된다.

삶이 그대를 속일지라도
슬퍼하거나 노하지 말라!
우울한 날들을 견디면
믿으라, 기쁨의 날이 오리니

마음은 미래에 사는 것
현재는 슬픈 것
모든 것은 순간적인 것, 지나가는 것이니
그리고 지나가는 것은 훗날 소중하게 되리니.

 

 

- 잘게 나눈 시간의 단위가 아니라 하나로 합친 전체의 단위로 보면, 삶은 끝없는 고난의 연속이 아니라 결국 기쁨의 날을 맞이하게 된다. 기쁨의 날 앞에 있던 우울한 날들은 우울하기만 한 시간이 아니라 소중한 시간이 된다. 따라서 우울할 때 우울에 갇힐 것이 아니라 우울한 지금이 그 상태로 멈춰 있지 않고 결국 지나가리라고 노래할 수 있는 것이다.

푸시킨의 시에서 현재 슬픈 것이 영원하지 않고 순간적이며, 결국 지나가게 되리라고 한 것은 애니메이션 [겨울왕국](2013)의 OSTLet it go’에도 그대로 나타난다.

추위도 나를 괴롭힐 수 없고,
(The clod never bothered me anyway)
참 재밌게도 무시무시한 것도 멀어지면 작게 보이거든.
(It's funny how some distance makes everything seem small)
……
지나가게 내버려둬, 지나가게 내버려둬.
(Let it go, Let it go)

 

 

- 떠밀린 삶을 살면 다수를 따라가니 ‘나’는 덜 불안하지만 여유가 생길 때마다 뒤를 돌아보며 다른 길을 가지 않았던 나를 부끄러워한다. 반면 좋아하는 삶을 살면 미래를 한 치 앞도 내다보지 못하니 불안하기 그지없지만 충실한 시간을 보내는 만큼 자아의 분열을 겪지 않는다. 공자, 푸시킨, 김득신 이 세 사람은 다른 시대를 살았지만 닮은꼴의 삶을 살아가려고 했던 인물이리라.

 

- 공자도 아무것도 보장되지 않는 삶을 살아가며 미래에 대한 불안을 느꼈다. 공자는 돈을 벌어야 하는 상황에 내몰리고 있었다. 하지만 그런 삶을 피하려고도 하지 않았고 미워하지도 않았다. 자기 자신이 그런 삶을 살아야 하는 운명이라면 그는 운명을 달게 받아들이겠다고 선언했다. 시장에서 채찍을 들고 질서를 잡는 일이라도 하겠다고 했다.

 

- 하지만 다르게 살아갈 수 있는 가능성이 1퍼센트라도 있다고 한다면, 공자는 자신이 좋아하는 삶을 살고자 했다. 자신이 내몰린 삶을 살아가게 되면 사람이 불안과 우울의 늪에 더 깊이 빠져들게 되리라는 것을 알고 있었기 때문이다. 공자는 자신이 진정으로 좋아하는 일에 몰두함으로써 불안과 우울에서 벗어나서 평안과 명랑의 정조를 지켜낼 수 있었다.

 

-공자와 같이 조선시대에도 자신이 좋아하는 일을 함으로써 우려와 불안을 날려버린 인물이 있었는데, 바로 김득신이다.

학문에 힘쓰는 자는


재주가 다른 이에 미치지 못한다고
스스로 선(한계)을 긋지 말라. (, .)
이 세상에 나처럼 머리가 나쁜 사람도 없을 것이지만,
나는 결국 이루었다. (, )
모든 것은 힘쓰고 노력하는 데 달려 있다. ()

 

 

-  이 참담함과 멍청함을 받아들이고 노력을 한 끝에 김득신은 59세에 과거 급제하고 성균관에 입학했다. 그가 고향집을 떠나 성균관에 첫 발을 디뎠을 때 그 벅찬 감동은 푸시킨이 말한 “기쁨의 날”과 같았으리라. 또 공자가 내몰린 삶을 살지 않고 자신이 좋아하는 삶을 살며 느꼈던 즐거움과 같았으리라.

 

- 신은 인간에게 마음이란걸 가슴에 담이두게 하셨다는데 정말 마음을 어떻게 갖느냐에 따라 삶이 달라지는걸 보니 맞는 말인듯싶다. 누구에게나 찬란하게 주어진 삶을 사랑하기 바라며.

 

 

 

8.

이 분의 책을 읽어보고 싶다.

 

신정근 | 성균관대 동양철학과 교수
서울대학교 철학과를 졸업한 후 서울대학교 대학원에서 석, 박사 학위를 받았다. 현재 성균관대 유학대학 학장을 맡으며 동양철학과에서 학생들을 가르치고 있다. 주요 저서로는 [마흔, 논어를 읽어야 할 시간] (2011), [신정근 교수의 동양고전이 뭐길래?](2012), [어느 철학자의 행복한 고생학](2010)], [맹자와 장자, 희망을 세우고 변신을 꿈꾸다](2014), [동양철학, 인생과 맞짱뜨다](2014) 등이 있고, 역서로는 [소요유, 장자의 미학](공역, 2013), [중국 현대 미학사](공역, 2013), [의경, 동아시아 미학의 거울](공역, 2013) 등 다수의 책이 있다. 앞으로 동양 예술미학, 동양 현대철학의 새로운 연구 분야를 개척하고, 인문학과 예술의 결합을 이룬 신인문학 운동을 진행하고자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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